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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승오 박

나를 찾겠다고 퇴사하면 망한다



홍콩 무협 영화에는 패턴이 있다. 복수심에 불타는 주인공은 위대한 스승 앞에 무릎을 꿇고 제자로 받아 달라고 간청한다. 하지만 스승은 그에게 쉽게 비급을 전수하지 않는다. 주인공에게 처음 주는 일은 어처구니없게도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이다. 어깨를 가로질러 매단 두 양동이 가득 물을 긷고, 힘껏 내리쳐 장작을 패고, 머리에 항아리를 이고 세워진 통나무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일을 몇 년간 반복해야 한다. 많은 제자들이 고된 일상과 스승의 냉담함에 화를 내며 떠나지만 주인공은 묵묵히 참는다. 그리고 어느 날 돌연 스승은 은혜를 베풀어 그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첫 관문을 통과한 주인공은 본격적으로 무술을 배운다. 그는 기본 초식을 익히며 자신의 유연함과 강인함에 놀란다. 그동안의 허드렛일이 자신도 모르게 기본기를 길러 주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단단한 기초 체력에 재능이 더해지면서 난이도가 높은 초식을 차례로 습득하며 일취월장한다. 결국 자신만의 필살기를 완성한 후, 하산하여 마침내 복수에 성공한다. 이런 줄거리는 비단 영화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신화와 영웅 이야기의 보편적인 원형이다.


직장 생활도 비슷하다. 조직은 신입 사원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 시험한다. 허드렛일을 주는 것이다. 큰일을 하기에 앞서 작은 일부터 성실하게 수행하는지 테스트하는 셈이다. 성실함이야말로 모든 직업인의 기본기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모든 비급도 기초 체력을 토대로 길러진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군살이 빠지고 근육이 제자리를 잡아 간다.

원하는 일을 발견했다고 해서 하루 빨리 시작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자신의 일을 찾아 퇴사했던 많은 이들 중 대다수가 1년이 안 되어서 더 안 좋은 조건으로라도 재취업을 하는 것은, 세상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웬만한 실력이 아니고서는, 고수들이 난립하는 무림에서 버텨 낼 수 없다. 우선은 원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일터와 직무를 수련장 삼아 실력을 갈고 닦아야 한다. 자신의 방향성을 가진 인디 워커는 회사를 얼마든지 학교로 만들 수 있다.


나는 15년간 직장 생활을 하고 1인 기업가로 독립했다. 그간 대기업과 중소기업, 컨설팅펌, NGO 등 다양한 조직을 경험했고, 퇴직 후에야 한 발짝 물러서서 그간의 경험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자유롭고 뚜렷한 주관을 가진 내가 조직 속에서 행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14년간 회사가 아니었다면 배우지 못했을 많은 것들을 그곳에서 배웠다고 단언할 수 있다. 적어도 다섯 가지 측면에서 회사는 내게 최고의 학교였다.


첫째로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LG전자에서 신입 사원 교육을 담당할 때 나는 개인적으로 계발한 ‘나침반 프로그램’을 사내에 도입해서 운영했다. 사실 이 프로그램은 조직 측면이 아닌 개인의 삶의 방향성을 찾는 과정으로 자칫 교육 담당자는 퇴사율을 걱정해 도입하길 꺼리는 교육이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 ’담당자’가 아닌가. 나는 ‘직업인의 자기계발’이라는 맥락에서 이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해서 도입했고 매년 3천 명의 신입 사원들이 이 하루짜리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성과도 좋아서 사내에서 몇 년간 가장 높은 만족도를 보인 교육으로 자리 잡았다. 많은 직원들의 피드백을 받아 수정한 덕분에 나침반 프로그램은 지금 내 회사의 가장 큰 수입원이 되는 상품이다.


둘째, 회사를 통해 다양한 사람을 이해관계로 만나며 부딪혀 볼 수 있다. 독립해 보면 별의별 특이한 고객의 요구를 접하게 된다. 이때 ‘저런 고객과는 일 안 해!’라고 가리기 시작하면 사업은 극히 제한된다. 조직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일하면서 나의 포용력을 넓힐 수 있다. 회사는 막내와 고참, 사원과 부장, 남녀노소 다양한 인간 군상이 부딪히며 희로애락을 함께한다. 때로는 ‘돌+아이’를 만나게(또는 모시게) 되고 이것이 엄격한 훈련 환경을 만들어 준다. 뿐만 아니라 회사는 내가 막내가 되었다가 선배가 되고, 팔로워였다가 리더가 되는 등 다양한 역할 변신을 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많은 자리를 경험하고 관계자들을 이해하는 연습을 할 수 있다.


셋째, 낯선 업무를 통해 잠재력을 깨달을 수 있다. 교육 컨설턴트 요세 아레츠의 연구에 따르면 업무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교육/독서(10%)나 멘토 등 타인과의 협력(20%)보다 실제 업무 경험(70%)이 월등히 높다. 특히 새로운 업무와 역할을 경험할수록 자연스레 잠재력을 탐색할 기회도 많아진다. 첫 직장인 카네기 연구소에서 내 첫 업무는 영업이었다. 또 2년차부터 강의를 했는데 인간관계 교육의 특성상 행동 학습 Learning by Doing 기반의 소위 ‘열정과다형’ 교육이었다. 둘 다 지극히 내향적인 내 기질과 어울리지 않았기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 경험 덕분에 지금은 사람을 유연하게 대하고 어렵지 않게 신규 고객을 발굴하고 수주를 따낸다. 또한 퍼실리테이션 Facilitation 중심의 강의에도 능숙해졌다. 낯설고 두려운 업무가 나를 키워 준 탓이다.


넷째, 각 부서의 역할과 협업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회사에서 가장 확실하게 배울 수 있는 한 가지는 회사라는 조직이다. 각 부서의 목표와 자원 할당, 업무와 역할 분배, 보고 프로세스 등 큰 조직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지에 대한 이해는 비즈니스에서 필수적이다. 비단 기업 대상(B2B) 사업자만 알아야 하는 게 아니다. 개인 대상 사업(B2C)의 고객 대부분도 직장인이다. 특정 부서의 고객들이 어떤 일을 하며 어떤 고민을 주로 하는지 알아야 고객을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다.


다섯째, 업무의 기본기를 습득할 수 있다. 여기서 기본기는 업무 목표는 어떻게 쪼개고, 시간은 어떻게 관리하여 납기를 지키는지, 이메일과 보고, 회의 등의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은 어떻게 하는지 등의 기본적인 업무 스킬을 말한다. 어느 업종 어느 조직에서 일하든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사람은 신뢰감을 주고 눈에 띈다. 가령 이메일을 하나 보내도 기본기가 튼튼한 사람은 제목과 내용은 물론이고 수신/참조인을 넣는 부분에서도 차이가 난다. 뛰어난 ‘일 센스’는 책이나 교육이 아닌 실제 업무 현장에서만 제대로 배울 수 있다.


이 다섯 가지 외에도 직장 생활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많다. 게다가 이 모든 배움에도 직장인은 수업료를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을 받는다. 이 정도면 훌륭한 학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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