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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커리어, 인디워커의 전략



1948년 딕과 마크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가 미국 캘리포니아의 샌버너디노에 새로운 형태의 식당을 열었다. 그들은 공장의 조립 생산 방식을 주방에 도입해 서비스 속도를 높이고, 거추장스러운 용품 대신 종이컵과 플라스틱 포크 등을 사용했다. 간소한 작업 방식으로 맛과 서비스의 품질 향상에 매진할 수 있었으며, 생산 단가가 낮아져 가격도 저렴했다. 여기에 뛰어난 경영 수완을 지닌 레이 크록 Ray Kroc이라는 사업가가 동참하면서 이 식당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가 ‘패스트푸드’라 불리는 비즈니스의 원형이 되었다.


지금은 너무나 유명해진 맥도날드의 성공은 시대의 흐름과 맞물려 있었다. 산업화로 바빠진 사람들은 간편한 식사를 원하고 있었고, 더욱이 미국 대공황의 여파로 저렴한 식사에 대한 요구도 커졌다. 패스트푸드는 이러한 산업화의 요구에 정확히 부합하는 식품이었다.

빠르고 얕게 vs. 천천히 깊게


산업화는 사람들의 먹는 방식뿐 아니라 일하는 방식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농경 사회에서는 남들보다 얼마나 빨리 일하는가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수확물은 노력보다는 날씨와 환경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화로 인해 업무가 쪼개지고 균일화되면서 성과를 측정하고 비교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과 노동자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인적 자원 human resource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경쟁력’이라는 말이 대두되면서 남들보다 빨라야 살아남는다는 패러다임이 자리 잡았다. 산업화와 함께 ‘패스트 커리어’가 탄생한 것이다.




패스트푸드가 건강과 미각을 해치는 것처럼, 패스트 커리어 역시 번아웃을 초래하고 삶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패스트푸드에 익숙해지면 자극적인 맛과 조미료에 중독되듯이 패스트 커리어는 승진, 연봉 등의 외적 보상에 집착하게 하며 결과적으로 자존감을 낮춘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패스트푸드에 익숙해지면 식도락(食道樂)은 사라진 채 음식이 ’연료’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패스트 커리어 역시 일에서 재미와 존재감을 탈락시켜 일을 ’밥벌이’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점차 ‘빠른 것의 위험성’을 깨닫고 있다. 맥도날드가 이탈리아의 로마로 진출하자 1986년 이탈리아에서 미각의 즐거움, 건강 회복 등의 기치를 내건 새로운 식생활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것이 전 세계로 확산되어 지금의 슬로푸드 운동이 되었다. 사람들은 느리게 살아야 더 행복하고 건강해질 수 있음을 깨닫고 있다.


이제는 식습관을 넘어 우리의 직(職)습관을 바꿔야 할 때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높이 올라가느냐가 아니다. 얼마나 자신에게 충실하며 그 과정이 행복한지가 핵심이다.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자신의 방식으로 할 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커리어를 추구해야 한다. 슬로 커리어는 깊이를 지향하는 커리어로, 내공을 쌓으며 점차 자립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대다수의 인디 워커가 취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패스트 커리어가 ‘이기는’ 커리어라면, 슬로 커리어는 때로 져주기도 하면서 궁극적으로 이길 필요가 없어지는 전략이다.


나는 슬로 커리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슬로 커리어 =

장기적으로 조직 안에서 자기다운 일로 자립하는 경력


우선, 슬로 커리어는 ‘장기적 관점’으로 직업을 바라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직장인은 자의든 타의든 50대에는 직장에서 나와야 하며 이후 30년을 스스로 벌어먹어야 한다. 퇴사 후 확실한 직업이 없다면 힘든 시절이 될 것이다. 슬로 커리어는 천직을 발견하여 그 일을 끊임없이 쇄신하며 원숙해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두 번째, 슬로 커리어는 ‘조직 안’에서 실력을 닦는 전략이다. 무턱대고 직장을 박차고 나오는 건, 특히 가족이 있는 경우라면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확실한 전문성을 쌓지 못한 채 퇴직한 많은 이들이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차리지만 통계적으로 절반 이상이 3년 안에 폐업한다.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서 나의 전문성을 발견하고 파내려 나가야 한다. 다만 깊이 파기 전에 ‘시추’의 과정이 필요하다. 조직 내에서 다양한 일을 수행하며 자신의 특성을 깊이 이해한 뒤에야 나와 어울리는 일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찾아낸 지점이야말로 전력으로 깊이 파야 할 곳이다.


다행스럽게도 확실한 방향성을 가진 사람에게 직장은 좋은 학교가 될 수 있다. 업무와 관련된 여러 실험을 월급을 받으며 해볼 수 있고,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혀 볼 수 있다. 새로운 업무를 통해 잠재력을 깨닫기도 한다. 인디 워커는 회사를 수련장 삼아 빠르게 전문성을 키워 나간다.

세 번째로, 슬로 커리어는 ‘자기다움’을 최대한으로 활용한다. 스스로 좋아하고 잘할 수 없다면 어떤 일이든 탁월함에 이르기 어렵다. 자기 탐색에는 적어도 세 가지의 관점이 필요하다. 나는 무엇을 잘할 수 있는가?(강점) 나는 무엇에 살아있음을 느끼는가?(소망) 일을 통해 어떤 가치를 실현하려고 하는가?(가치관) 이 세 가지 질문의 접점이 곧 ’나’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2040년이 되면, 당신이 알고 있는 것들 중 하나만 빼고는 모두 쓸모없어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유일하게 쓸모가 있는 지식은 《당신 자신에 대한 앎》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앞으로의 시대는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본 사람의 몫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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