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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승오 박

아내가 울었다

최종 수정일: 2021년 7월 27일



「모르겠어? 나는 당신처럼 혼자 갈 자신이 없어!」


아내가 울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대화는 끊겼고 아내는 얼굴을 감싸 쥐고 흐느꼈다. 나(승오)는 멍하니 식탁을 응시한 채 말을 삼켰다.


몇 달 전부터 아내는 오래 다닌 출판사를 그만 두고 싶어 했다. 회사가 멀어 매일 3시간을 출퇴근에 쓰다 보니 체력이 고갈되었다. 함께 일하던 직원과 사이가 좋지 않아 스트레스도 많았다. 회사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을 만들었지만 정작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기조차 버거워 했다. 균형이 깨진 것이다. 아내는 무던한 성격이었지만 당시에는 툭하면 일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내가 계획 없이 대기업 퇴사를 의논했을 때에도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좀 참아 보라고 무심히 말을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아내는 잔을 비우며 단단히 결심한 듯 말했다. 연말이 되면 그만 두겠노라고, 일단은 쉬면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보고 싶다고, 무엇보다 동화를 직접 써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내심 기뻤다. 오랫동안 아내에게 ‘남의 글 고쳐 주지만 말고 당신 자신의 글을 써봐’라고 잔소리하던 터였다. 나는 찬성했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아내 쪽의 수입은 줄 테지만 내겐 돈보다 시간이 더 중요했다. 나도 프리랜서로 혼자 일하니 가족이 함께 보낼 시간은 훨씬 많아질 터였다. 아내는 회사를 그만두면 하고 싶은 일들을 뭉게뭉게 펼쳐 내기 시작했다. 우선 미뤄 왔던 가족 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우리는 아이들의 방학에 맞춰 두 달간의 치앙마이 여행을 위해 비행기 표를 샀다. 술에 취했는지 꿈에 취했는지 그 밤 우리 부부는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희망에 한껏 부풀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러 여행을 한 달 남긴 날, 퇴근한 아내가 맥없이 말을 꺼냈다.

「회사에 이야기했는데…… 육아 휴직 두 달만 하기로 했어.」


나는 화를 내고 말았다. 퇴사가 아닌 휴직이라니, 게다가 고작 두 달……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아내가 자신의 길을 갈 것이라 믿었다. 굴곡이야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강해질 것이었다. 나는 체념하듯 물었다. 몇 년간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았느냐고, 겨우 두 달 쉬고 복귀하면 이전처럼 불평하며 우울해하지 않을 자신 있느냐고. 거칠게 내뱉는 내 말을 아내는 나무처럼 듣고 있었다. 나는 설득했다. 당신은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좋은 작가야. 나보다 글을 잘 쓰니 좋아하는 동화책을 쓰며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어, 그렇게 다독이듯 말했다. 그러자 둑이 터지듯 아내가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나는 당신처럼 혼자서 뭔가를 결정하고 해낼 자신이 없어. 내가 뭘 잘하는지조차 모르겠는걸. 10년을 넘게 일했는데 내가 아는 거라곤 이 일이 나랑 맞지 않는다는 것뿐이야. 그런데 어떡해? 여기서 내려놓으면 내 경력은? 나중에 회사로 영영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 그러다 내 자신이 싫어지면? 나는 그렇게 강하지가 않아.」


먹먹했다. 그 말에 대응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다. 자신을 아끼기에 벼랑 끝으로 몰아세울 수가 없는 것이다. 마흔 살에 안전한 울타리를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내의 항변은 정당했다. 내가 무리한 요구를 반복했음을 깨달았다. 바깥은 춥다. 옷을 단단히 갖춰 입으려는 사람에게 내복 차림으로 빨리 나가라고 재촉했던 것이다. 내게 그럴 자격은 없었다.


나는 성공적인 직장 생활을 하지 못했다. 14년간의 직장 생활은 실망과 도망의 연속이었다. 내 커리어에는 어떤 패턴이 있었다. KAIST라는 학벌을 보고 기대감을 가졌던 경영자들은 회사에 충성하지 않는 내게 실망했고 이내 냉소로 변했다. 몇 년 사이 달라진 대우를 보며 나 역시 회사에 실망하고 결국 도피하듯 이직하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공학도에서 기업 교육(HRD) 업무로 경력을 급격하게 바꾼 내 탓도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호기심의 대상이었을 뿐, 주목의 대상은 되지 못했다. 직장에서 나는 객체로서 변방을 떠돌았고, 중심부에서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을 평가 절하하면서도 내심 부러워하곤 했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놓지 않으려 했다. 나만의 교육 콘텐츠를 갖는 것이었다. 세 번을 이직했음에도 나는 직무를 바꾸지 않고 교육 업무를 계속했다. 회사에서 교육 과정 개발과 강의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동경해 온 작가 구본형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고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고 책을 썼다. 때로 회사 몰래 외부 강의를 다녀오기도 하고, ’나침반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말에는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는 스승을 닮고 싶었다. 그처럼 작가가 되고 싶었다. 성공은 못 해도 내가 좋아하는 일과 함께 울고 웃으며 평생 밥벌이를 하고 싶었다. 직장을 다니며 6권의 책을 썼고 매년 300시간 이상 강의를 했다. 직장에서 나는 객체였지만, 내 세계에서는 주체였다.


그리고 몇 년 전 퇴직을 했다. ’컨텐츠랩 클루 Qlue’라는 1인 기업을 만들고 스스로 대표가 되었다. 작은 숲이 보이는 책상에서 매일 읽고 쓰며 가끔 강의를 한다. 오전은 읽고 싶은 책과 쓰고 싶은 글로, 오후는 해야 하는 일들로 균형을 맞춘다. 6시면 퇴근해서 요리를 하고 아내를 맞이한다. 일 년 중 두 달은 아이들과 여행을 다니고, 그 영상들을 ‘아이와 세계 한 달살이’라는 유튜브 채널에 올린다. 무엇보다 웃음과 감동이 없는 하루를 보내지 않으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독립 첫해부터 내 수입은 마지막 직장의 연봉을 넘어섰다. 회사에서 만난 여러 인연들의 도움이 컸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오랫동안 붙들면서 쌓은 나의 콘텐츠 덕분이었다.


얼마 전 아내가 말했다. 가수 박정현이 리메이크한 「My way」를 듣고 너무 좋았다고. ’ I did it my way(나는 내 방식대로 해냈다)’라는 마지막 가사를 듣고 있노라니 당신 생각이 났다고. 늙어서 당신이 손주들에게 해줄 말 같아서 부러웠다고 했다. 고마웠다. 돌아보면 나의 자립은 아내의 따뜻한 지지 덕분이었다. 그런 아내의 힘든 마음을 나는 보듬지 못했다. 나는 자책했고, 그날 이후 아내의 커리어에 대해 어떤 조언도 하지 않았다.

경력을 뜻하는 영어 커리어career의 어원은 라틴어 carrus인데, 이것은 로마 시대 전속력으로 달리는 마차의 경주 트랙을 의미한다. 영화 「벤허」의 질주하는 이륜마차 경기를 떠올리면 커리어가 가리키는 바를 이해할 수 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전속력으로 내달리며 장애물을 피하고 마차가 전복되지 않으려 애쓰는 과정이 곧 커리어다. 경력이라는 말 속에는 ‘전속력’과 ‘경쟁’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지금껏 너무도 당연히 패스트 커리어fast career를 추구해 왔다. 많은 직장인들이 경쟁자들보다 빠르게 피라미드의 전망 좋은 곳까지 오르기 위해 전력 질주했다. 조직은 이런 야망 있는 직원들에게 확실히 보상함으로써 더욱 일에 몰두하게 했다. 과몰입의 결과는 탈진이었다. ’워라밸’이라는 유행어가 무색하게 직장인 10명 중 9명은 번아웃을 경험한다. 더 큰 문제는 퇴직 이후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죽을 둥 살 둥 달리다 보면 어느새 귀밑머리가 허옇다. 평생 시키는 일만 했으니 퇴직 후 할 수 있는 사업도 없다. 과연 빠르게 올라서는 것이 진정 성공한 커리어인가? 후회할 때는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커리어’의 의미를 되짚어 볼 때다. 인간의 수명은 100세를 바라보지만 퇴직 연령은 높아지지 않았다. 코로나19 이후 대규모의 구조조정이 예고되어 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제 인공 지능이 일자리를 잠식하고 디지털에 능한 밀레니얼 세대들이 치고 올라오고 있다. 운이 좋아 50세쯤 회사를 나온다 해도 이후 30년을 무슨 일을 할 것인가? 50세는 일을 그만두기엔 너무나 정력적인 나이다.


생각을 바꿔야 한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깊이다. 빠르게 올라서는 것보다 확실하게 실력을 다져서 화사 안에서든 밖에서든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일해야 한다. 코로나19로 직업의 불확실성이 커진 이 상황에서 나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탁월한 실력뿐이다. 회사 안에서 나를 위해 천천히 실력을 다지는 경력 관리, 곧 슬로 커리어slow career가 필요한 시대다.


IMF를 기점으로 지난 20여 년간 회사가 직원을 대하는 방식은 사뭇 달라졌다. 구조조정은 상시화되었고 직원들은 언제든 대체 가능한 ‘인적 자원 human resource’으로 전락했다. 이제는 당신이 직장을 대하는 방식을 달리해야 한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직장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직업’을 만들어야 한다. 직장에서의 성공이 아니라 내 직업에서 성공하기 위해 직장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어떤 직장도 나를 보호해 주지 않으며 탄탄한 직업만이 내 삶을 보호할 수 있다.


슬로 커리어는 자립적 직업인, 곧 인디 워커 Indie Worker를 목표로 한다. 이는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확실한 차별성을 갖춰 회사 안에서도 자립적인 전문가로 일하고 퇴직 후에도 독립적인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패스트 커리어가 외적인 상승을 지향한다면, 슬로 커리어는 내적인 깊이를 추구한다. 그러려면 자기 이해는 필수적이다. 내가 원하는 것과 잘하는 방식을 현재 업무에 녹여 냄으로써 조직 안에서도 차별적 전문가로서 성장할 수 있다. 이때 직업은 생계 수단을 넘어 자기실현의 장이 된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아내에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또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두 달간의 태국 북부 여행을 마치고 아내는 회사로 복귀했다. 여전히 바쁘고 힘들지만 ‘그래도 여행 다녀오니 힘이 난다’고 말하는 아내가 조금 안쓰러웠다. 언젠가 아내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작은 오솔길도 있다고, 처음에는 조금 어둡고 외로워 보이지만 몰입과 희열이 흐르는 작은 길이 있다고. 그러나 꾹 삼켰다. 대신에 나는 글쟁이로서 이 말들을 글로 쓰기로 결심했다. 잔소리 대신 진심 어린 글이라면 아내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내용을 책으로 낸다면 비슷한 고민을 하는 직장인들에게 도움이 될 테니 책이 잘 팔려 인세가 왕창 들어올지도 모른다. 나는 당장 이 일을 하기로 했다.


모두가 경주용 트랙에서 미친 듯이 질주할 필요는 없다. 경주에 지쳤다면 트랙을 벗어나 자기 속도로 걸어도 괜찮다. 뒤처진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차분히 준비한다면 자신만의 작은 길을 찾게 될 것이다. 조직 안에서든 밖에서든 천천히, 자기답게 다져 가는 커리어가 얼마든지 가능해진 시대이기 때문이다. 점점 늘어나는 인디 워커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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